본문 바로가기

스크랩

[스크랩] 마르크스보다 삼백 년 앞선 선각자 허 난설헌

- 쓰신 분의 본명을 할 수는 없으나,

'한겨레'라는 필명으로서 유학생싸이트에서 글발을 날리는

어느 분의 글을 옮겨왔습니다-

 

...........................................................

 

 

마르크스보다 삼백 년 앞선 선각자 허 난설헌

        - 시인의 직관으로 "노동의 소외" 를 간파해 -
 
1990년대 초반에 두 해동안 학생신분으로 독일에 머문 바 있는 여성운동가이자 언론인인 김신명숙씨는, 신사임당 초상이 5만원권 화폐의 도안으로 발표되었을 때 가장 앞서서 반대한 사람으로서, 그 대안으로서 허 난설헌을 현대 여성의 모델에 적합한 인물이라 내세우면서 "허 난설헌이야말로 오늘에 되 살려야 할 역사적인 인물이다. 현모양처의 전형 신 사임당은 이제 허 난설헌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한국적 여성주의자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적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김신명숙씨의 주장에 의하면, "시대가 바뀌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인 인물도 바뀐다. 조선시대의 이데올르기에 의해서 신 사임당이 가장 대표적인 현모양처로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남성들의 역사에서 남성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신 사임당이 조선시대 여성의 대표 자리를 차지해 온 것이었다. 이제는 남성 본위의 'History'가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보는 'Herstory'를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심하게는 조작되고, 은폐되었던 역사를 이제 여성의 시각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여성이라면, 신 사임당 보다는 허 난설헌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 이는,
"신 사임당도 훌륭한 여성입니다. 신 사임당을 폄하 하자는게 아니고, 그 사람도 훌륭한 사람인데, 그러나 우리 시각으로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히스토리에서 만들어진 그런 모습이 아니라, 신 사임당도 재조명해야 되고, 그리고 특히 새롭게 재조명해야 할 여성상의 모델로는 '허 난설헌이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를 비롯한 여성주의자들의 생각입니다"라고 강조했었다.
 
허 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 거처하던 별당의 당호가 난설헌(蘭雪軒) 혹은 난설재(蘭雪齋) 라고 불리었다.
부의 재능을 타고났으나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 우리 국문학의 큰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시인 허 난설헌 !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남편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일생의 세 가지 커다란 한()으로 꼽으며 비극적 생애를 짧게 마친 그이 또한 신 사임당과 같이 강릉이 낳은 빼어난 여성이다.

어릴 때 오라버니와 아우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 글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이의 나이 여덟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부친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허엽은 대학자 서경덕이황의 제자로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이 난설헌과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초희의 글재주, 서예재주를 아깝게 여긴 오라버니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허성,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李達)에게 시와 글을 배울 때 그 이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초희의 나이 열다섯 무렵에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는데,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 이의 시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 이를 피하였고, 그런 아들의 방탕이 “잘난 며느리에게 그 원인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1580(선조 13)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아들과 딸을 여의고서 지은 시를 읽어보면 그 이의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절절했는가를 잘 알 수있다.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며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곧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다. 그리고 남편 김성립은 계속 밖으로 겉돌았다. 시재 詩材와 문명 文名은 당대에도 알려졌지만, 남편을 기다리며 쓴 詩조차 사대부들로부터 음란하다는 폄하를 받기 일쑤였다, 그 이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어하는 신선시가 128수나 되는 까닭이, 이러한 당시 조선사회의 고리타분한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이는 서예와 그림에도 능하여 풍경화와 수묵담채화, 난초화 등 수 많은 작품을 남겼다.

 

 

1589년 초 허 난설헌의 나이 스물일곱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유언시를 남겼다 한다.

  今年乃三九之數          금년이 바로 3·9수(스물일곱)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도다

가히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졌던 사람답게 이 세상 떠나갈 날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 난설헌은 많은 작품을 생전에 태워버렸으나, 세상을 떠난 후 동생 허균이 이전에 베껴 놓은 것과 기억에 남은 것을 모아 그녀의 시를 《난설헌집》으로 펴내 지금까지 전한다.  허균은 1608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작가들에게 이 <난설헌집>을 보여, 난설헌의 시재에 탄복한 명나라 관리들의 주선으로 비용을 지원받아 중국땅에서 출간하여 그 간행본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1711년에는 일본에도 소개되어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그의 시를 간행,  한때 일본조야에서 애송되기도 하였다.

그뒤 허균이 광해군 말년 옥사당하면서 잊혀졌다가, 1940년 무렵 소설가 월탄 박종화선생이 허 난설헌의 시와 작품성을 평가 소개하면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허 난설헌은 특히, 가난한 집 쳐녀는 열심히 옷감을 만들어도 그 옷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조선사회의 빈부격차와 불공평을, 임금노동자는 그가 생산하는 소유물을 갖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미 삼백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노동의 소외”를 알린 선각자였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
뉘 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되려나
손으로 싹둑싹둑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 갈 옷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

허 난설헌은 또 시를 통하여 저들만 잘 먹고 잘 사는 조선의 사대부들을 조롱했고,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면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불평등을 고발하는 강한 분노와 개혁지향의 의지를 나타냈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누각에선 노래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려졌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규중의 부인이 갖고있는, 남자들보다 더 뛰어난 문재(文材)와 높은 예지(睿智), 그리고 사회비판의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을 기다리며 쓴 애절한 그 이의 기다림의 시들은 이들 사대부들에 의해 음탕한 시문으로 평가절하됐고, 심지어는 비교적 개화에 앞장 서 있던 실학의 거두 연암 박지원조차 그의 <열하일기>에, “규중부인으로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조선의 한 여자로서 그 꽃다운 이름이 중국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가 없다.“ 라고 기술해놓았으니,  사대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들이기에,  중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조선으로 역수입된 허 난설헌의 명성을 못마땅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양성평등과 사회정의를 지향하는 여성의 역할을 외치는 여성운동가들이 신 사임당 대신 허 난설헌을 “우리시대에 필요한 여성 모델” 이라고 내 세우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현모양처의 상징이라면 역시 신 사임당이 한 수 위일 듯 싶다. 
                     

 

출처 : 바람재 들꽃
글쓴이 : 왜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