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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

박용만(독립운동가) 삼만 (정순만,이승만, 박용만)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은 1881년에 태어났다. (그의 출생신고는 1882년으로 되어 있다.)

신채호는 임시정부 조직 때, 이승만의 국무총리 선출에 반대하며 후보자로 박용만을 추천했었다. 박용만. 그는 누구인가? 단재 신채호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직에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과 같이 추천되었던 인물. 하지만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박용만은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삼촌 밑에서 자랐다. 일찍 일본으로 유학하여 중학교 졸업 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2년간 정치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박영효와 친분을 맺었다.

귀국 후 안국선 등과 개혁운동에 참여했다. 그 결과 1904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이승만과 정순만을 만나 '삼만'이라는 의형제를 맺었다.

석방된 후 그는 미국으로 갔다. 의형제인 이승만과 정순만의 아들들과 동행했다. 이승만이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의 원고를 가지고 가서 191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1908년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해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여 1912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덴버에서 애국동지대표회를 소집하여 미국 정치지도자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 대표회에 이승만, 이상설 등이 참여했다.

1909년 6월 그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 농장에서 소년병 학교를 시작했다. 한인무장독립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이 단체는 박용만이 후일 하와이로 옮겨간 후에는 거주 한인의 수가 줄어드는 영향 등으로 1914년 문을 닫고 말았다.

박용만은 학업을 수행하면서 소년병학교를 운영하고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고, <아메리카 혁명>, <국민개병설> 등 세 권의 책을 저술했다.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였음은 틀림없다.

그는 1911년부터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했다.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무장훈련을 하고, 독립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주목한 곳이 하와이였다.

하와이는 1903~1905년 사이에 약 7천3백 명의 한인이 이민한 곳이었다.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1908년 8월말 하와이 각지에 있었던 24개 단체 대표자들이 호놀룰루에 모여서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09년 2월 1일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와 결합하여 국민회가 되고, 1910년 5월에는 다시 대한인국민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박용만은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민회 지방총회에서 채택된 "선언문"의 작성자다. 이 선언문을 통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들 전체를 대표하는 단체가 되었다. 박용만의 임시정부안이 빛을 발한 것이다.

박용만은 곧바로 하와이로 들어갔다. 당시 하와이에는 5천여 명의 한인이 있었다. 박용만은 하와이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었다. 박용만은 이곳에 군사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안원규와 박종수 두 사람이 자신들의 농장을 박용만에게 기부하여 군사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을 1914년 6월 10일에 창설할 수 있었다. 240명의 지원자를 받았으며, 박용만은 군단장에, 박종수는 대대장이 되었다. 지원자들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받았다. 지원자 중에는 대한제국 시절 군인들도 있었다.

국민군단이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1916년 10월에 문을 닫았다고 하는데, 1917년에 국민군단이 호놀룰루 시가지를 행진하는 사진이 남아있어서 더 오래 지속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문을 닫은 이유는 일본 측의 압력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국민군단의 군가도 남아있다.

<대조선국민군단의 군가>

흑룡강 맑은 물
남북 만주 푸른 풀 넓은 들
우리 말 안장 벗겨라
국민군 군가 부르세


군가가 만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박용만이 만주를 근거로 해서 독립전쟁을 벌일 계획을 가졌기 때문이다.

1915년 박용만은 이승만과 충돌한다. 박용만은 보아온 바와 같이 무장투쟁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반면 이승만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외교를 통한 독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런 노선 차이가 두 사람의 갈등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사건의 촉발은 국민회의 공금 유용 건이었다. 충돌 결과 이승만이 승리했다. 새로운 대표부가 이승만 측근들로 구성되었다.

박용만은 1919년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서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곧 3.1 운동의 소식이 하와이에 전해졌다.

4월에 한성임시정부는 박용만을 외무부총장으로 임명했다. (이때 이승만은 집정관총재로 뽑혔다.) 그는 5월에 시베리아로 파견된 미군에 합류해서 태평양을 건너갔다. 그해 9월 상해임시정부에서 외무부총장이 되었고, 그 자격으로 소련 정부와 교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는 1921년 3월 북경으로 가서 신채호 등과 함께 군사단체를 통합시키고자 군사통일회를 조직했다.

박용만은 매우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는데, 그러던 중 1923년 8월, 중국 경찰에 억류되었다. 부하 김현구의 권총자살 건으로 조사를 받은 것이다. 일본 측은 즉각 박용만의 국내 송치를 요청했다. 하지만 다행히 중국 측은 이런 요청을 거절했다.

그런데 박용만은 돌연 1923년 12월말에서 1924년 1월 사이에 한국을 다녀왔다. 더구나 이 방문은 조선총독부와 협상에 의한 것이었다. 1923년 12월 20일 북경을 떠나 상해와 나가사키를 거쳐 서울에 들어갔으며, 1924년 1월 13일 하얼빈에 나타났다.

그가 서울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한국국민위원회 비서장에 선출되었는데, 그 해 6월 15일에 제명되었다. 제명의 사유는 바로 극비 서울 방문이었다.

박용만의 주장은 <연경야화>라는 책자에 남아있다. 그 책자에 의하면 그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퍼진 공산주의자들의 횡포에 한일이 협력하여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인을 전쟁에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측이 이 제안을 수락한다면 자신이 첨병이 되어 앞장 서겠노라고 말하고 있다.

박용만은 더 이상 무장투쟁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만주에 새로운 한국인 정착지를 건설코자 했다. 이를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그는 1925년 하와이로 돌아갔다. 이 계획에 안창호와 문창범이 동의했다고 한다. 박용만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조선 반도는 지역이 협애하여 도저히 완전한 독립국으로 만들기 부족하다. 구조선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고의 땅을 근거로 하여 조선인을 여기에 이주시켜 발전을 추구하여 이 지방을 사실상 동포의 영유로 귀속하게 할 것이다."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3만 달러를 모집하여 1926년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동키호테 같은(아니, 어쩐지 유사역사가의 냄새가...) 계획은 실현난망했다. 더구나 그는 이미 변절자로 낙인 찍힌 몸이었다.

1928년 10월 16일 박용만은 북경 자택에서 이구연(李龜淵, 1896.2.8~1950.8.14) 일명 이해명(李海鳴)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47세였다.

이구연은 3.1 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해서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의열단에 가입한 사람이다. 황포군관학교 6기생이기도 하다. 그는 이 사건으로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광복군 출신들과 함께 한국군 결성에 참여했고, 6.25때 대전에서 전사했다.

박용만과 이구연은 모두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았다. 박용만의 경우, 그가 과연 친일파로 변절한 것인지 확증할 수 없다. 이구연은 이청천의 지시로 박용만을 암살했다고도 하고, 의열단의 지시로 암살했다고도 하는 등 암살의 배후, 이유 등에서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책을 많이 참고했다.

최영호, 박용만, 한국사시민강좌 47, 일조각, 2010
홍윤정, 하와이 한인사회의 형성과 애국의식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