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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

좌옹 윤치호 애국가를 작사하다!

윤치호(尹致昊)  

 1865(고종 2)~ 1945.

한말의 정치가·계몽운동가.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출신

1930년 모교인 에모리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조선선조때의 영의정 윤두수의 둘째아들 윤흔의 6대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초기 개화파 정치인 윤웅렬과

전주 이씨사이에서 출생하였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5촌 당숙이다.

 

 

윤치호

 

일제하에 교육사업과 선교활동에 종사했다.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좌옹(佐翁).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으나, 그뒤 향반(鄕班)으로 몰락했다가 아버지 때에 이르러 가세가 재건되었다. 아버지는 무관출신으로 군부대신을 지낸 웅렬(雄烈)인데,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으며 '개화당'에 속했던 인물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11세부터 서광범(徐光範)의 친척 김정언(金正言)의 집에서 숙식하며 수학했으며, 15세 되던 해 정동의 강씨(姜氏)와 정혼한 뒤 1881년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朝士)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1883년 4월까지 체류했다. 이때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알선으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했다.

1882년 도쿄제국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L. G. 밀레트와 동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 등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또한 김옥균(金玉均)·서광범·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물과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의 경영자 후쿠자와[福澤諭吉], 동인사의 경영자이며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나카무라[中村正直] 등 당대 일본 최고의 문명개화론자들과 교유했다.

이 과정에서 서구근대문명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체험하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한 근대화 방안을 구상했다.

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 L. H. 푸트의 통역으로 귀국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통역으로서 푸트와 고종, 개화파 간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간섭 배제와 미국과의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에 힘썼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는 개량적 근대화론자로서 주도층과의 시국관 차이로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옥균·박영효 등과 절친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왕의 허락을 얻어 1885년 1월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미국 총영사 G. 스탈의 알선으로 미국 감리교 선교사 A. 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했다. 여기서 3년 6개월 동안 체계적인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앨런과 W. B. 보넬 교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 기간 동안 낙후된 조선과 중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조선 근대화에 대한 절망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중서서원을 수료한 뒤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대학에서 신학과 영어 코스를 수학하고, 에모리대학에서 2년 동안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을 수강했다.

 미국 유학기간 동안 기독교와 민주주의, 과학문명에 기초한 성숙한 사회를 경험하면서 이를 근대사회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했다.

그 사상적 기초는 '힘의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었으며, 사회개혁에서는 미개한 전통사회를 선교와 교육이라는 국민개조를 통하여 근대사회를 형성한다는 국민계몽의 방식이었다.

 5년 동안의 미국 유학을 마친 후 청일전쟁 기간 동안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895년 2월 귀국해 김홍집 내각의 외부협판과 박영효 내각의 학부협판 등을 지냈다.

1896년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1897년 후반부터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운동을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 등 국민계몽 활동에 힘을 쏟았다.

1898년 3월 만민공동회를 주관하여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러시아 운동을 전개해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서재필이 추방당하자 1898년 8월 제2대 회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만민공동회를 주최, 헌의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1898년 12월 강제적인 정부의 해산조처로 해체되고 말았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러일전쟁까지 5년간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 천안군수 등 지방관을 전전했다.

이 기간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3국제휴론'을 주장했으며,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기뻐하는 모순된 사고구조 속에서 한국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계몽운동과 일제하의 활동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했으며, 외부대신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을 거부했다.

당시 상소운동·외교운동·자결행위·의병전쟁 등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의 확대와 산업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계몽에 노력했다.

그러나 대한자강회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었다.

같은 해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신민회의 회원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또한 안태국(安泰國)과 더불어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는 한편, 신사상·신사업의 개발 등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했다.

그가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인 사업은 남감리교 선교부가 1906년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을 통한 교육사업이었다. 그는 원장으로 실업교육을 제일 중시하여, 청년들에게 근로정신을 고취, 노동을 천시하는 폐습을 타파하고 경제적 자립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힘썼다.

한편 현실생활의 구원을 통하여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의 장으로서 기독교모범촌 건설계획을 추진했으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으로 일했다.

1912년 총독부가 민족운동세력과 기독교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날조한 '105인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복역하다가 석방되었다.

출감 뒤 YMCA 총무·회장, 연희전문학교·기독연합재단법인·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이사, 송도고등보통학교·연희전문학교 교장, 조선체육회·흥업구락부 회장 등을 역임하며 신교육운동과 기독교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 일본의 '독립불용인론'을 전제로 '자치능력결여론'도 주장했다.

조선의 당면문제는 유해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지적·경제적인 상태의 향상을 통하여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1920년대에는 교풍회(矯風會)·각도인민대표자대회·조선인산업대회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친일단체와 모임에 깊이 관여했다.

만주사변 직후 총독부 관료와 친일조선인 간의 친목단체인 토요회에 참여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내선일체'의 실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며 강연회에서 '반도민중의 협력'을 강조했다.

 1941년에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에 대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고문으로 일제의 징병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에 선임되었다. 저서로 〈우스운 소리〉·〈영어문법첩경〉이 있으며, 역서로는 〈찬미가〉·〈의회통화규칙〉·〈이솝 우화〉·〈걸리버 여행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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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尹致昊, 1864년 12월 26일 - 1945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가, 기독교 운동가, 계몽운동가, 언론인. 호는 좌옹(佐翁)이며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회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 세례교인이었다.

 

개화파로독립신문사의 제2대 사장이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운동, 민권운동을 벌였으나 민중들의 배척을 받게 되자 민중을 경멸,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양성론에 매진하였다가 흥업구락부, 청구구락부 사건 등을 계기로 결국은 친일로 전향하였고, 이것이 죽음에도 영향을 줬다.

 

공식화되진 않았지만 여러 자료들을 통해 애국가의 작사자임이 확인되었다.

한국전쟁중에 대한민국정부에서 공식발간한 문서에 윤치호 이름이 박힌 걸로 확정.
덕분에 애국가는 작사가도 친일파, 작곡가도 친일파가 되는 셈이 되어 다시금 정통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구한말의 병조 형조판서,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과 전주이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의 양반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고조부 때에 수원에서 천안으로 이사했고, 고조부의 넷째 아들인 증조 할아버지 윤득실은 천안에서 분가해서 아산으로 내려왔다.

이후 그의 집안은 충남 아산과 서울을 오가며 생활한다.


증조부 윤득실은 없는 살림에도 거지들을 구제하고 어려운 이를 보살폈는데, 시주받으러 다니다가 굶고 쓰러진 승려를 데려다가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승려는 이순신 장군의 묘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이 잘될 거라고 일러주었고, 후에 윤취동은 아버지 득실을 그곳에 몰래 암장했다.

그리고 나서는 자손이 번성했고 출세했다는 것이다.

윤치호 이후 그의 집안엔 그의 3형제, 사촌 10남매가 출세하고 그 뒤로도 조카뻘, 손자뻘 항렬에 이르기까지 400여 명의판사,의사등 인물들이 줄줄이 쏟아져나왔다.

그에겐 10여 세 아래인 서모가 있었는데 그에게서 30살 이상 나이차이 나는 이복동생 윤치왕과 윤치창이 태어났다.
윤치호의 가문은 해평윤씨였지만 하필이면 서자집안이었다.

그것도 몰락한 서자 가문이라서 윤두수,윤근수이후 그의 직계에서는 아버지 윤웅렬이 가문의 첫 번째 과거 급제자였다.

즉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던 셈이다.

아버지 윤웅렬의 출세에 이어 삼촌 윤영렬이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는 데 기여하고 안성군에 동학을 사칭하는 도적마저 토벌하여 명성을 날리면서 그의 집안은 다시 일어났다.

아버지와 삼촌이 승승장구 출세할 무렵에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 윤웅렬은 그의 기억력이 좋은것을 보고 아들 교육에 신경 썼다.


윤웅렬은 승진 내내 서자라는 이유로 갖은 핍박을 받았고 이는 똑똑한 아들 치호에게도 분명해 보였다.

결국 고민한 끝에 윤웅렬은 친구이자 당시 개화파였던 어윤중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윤치호는 어윤중의 제자가 되어 그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그를 따라 일본에 가서 신학문을 배웠다.

서얼과 중간관료는 농업학교로 보내는 관례를 깨고 그는 양반집 자제들과 함께 동인학당에 들어가 서구의, 과학,의학,종교 사상을 접하게 된다.

이후로 그는 중국과 조선의 유교사상을 혐오하였으며 비인간적인 속박체제로 보고 개혁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한국으로 되돌아 와 조선공사관 총영사로 파견된 푸트 장군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관직에 나가 김옥균을 만나 감화받고 서재필 ,박영효,서광범등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당과 친분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실패를 예언할 정도로 비관적으로 보았고 또 그 예언이 적중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은신해 있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윤치호는 개화당파로 몰려 중국 으로 원치 않는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된다.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공부 목적으로 유학을 한 그는 배편으로 일본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중서서원에서 공부한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유학생이 된다.

밴더빌트 칼리지에서 수학한 뒤, 그는 4년제 대학인 에모리 대학으로 진학하여 신학을 전공한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는 여행을 다니며 견문도 익히고 미국의 인종차별및 실력 양성,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등을 절절히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유교, 그리고 중화사상에 빠진 조선에 대한 비판은 절정에 달했고 그는 귀국후 민권사상과 기독교식 합리주의로 민중을 깨우치겠다고 결심한다.

그뒤 모교인 중서서원에서 교사로 생활하다가 귀국한다.


한때 미국 각지를 여행하기도 했고, 미국 체류 중 동지 서재필과 상봉하기도 했다.

미국 유학 중 그는 남감리교회의 목사로부터 감리교인으로 세례를 받기도 한다.

1895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민영환을 따라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갔고 민영환을 따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윤치호는 이후 자신의 재능을 살려 교육, 및 실력 양성 부분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만민공동회 강연활동을 통해 민권 사상,민주주의사상, 만인의 평등론을 설파한다.

이때 그가 관여한 것이 독립협회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고종에게 반역 의도로 알려지게 되고 곧이어 독립협회가 사실상 해체수순을 밟게 되자 더이상 조선에 대한 발전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독립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를 주장했고, 민권사상과 민중의 참정권을 설파하며 순회계몽강연을 다녔으며 독립신문사 사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민권사상과 참정권 외치고 민중에 의한 정치를 부르짖었음에도 민중에게 외면당하고, 되려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것에 대한 반발감, 거부감, 황제에게 불충하는 자 정도로 낙인찍히자 그는 민중에 대한 애정을 가졌던 것만큼 민중에 대한 경멸과 증오감을 품게 된다.

동시에 민권사상을 외쳤음에도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민중들을 경멸하여 이후 윤치호는 냉소와 철저한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로 일관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자기 집안에 대한 내력을 객관적 또는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위에 느낀 애정에서 분노로서 하는 심정 이해가 오히려 힘들어졌다.

함경도 원산에 가서는 씻지 않고 게으르고 지저분한 서민들의 생활을 보고 조선인은 할수 없다는 생각을 확신으로 굳히게 된다.

이후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의 대상으로 민중관을 바꾸게 된다.

그뒤 그는 관직생활에 꾸준히 투신, 덕원부윤 겸 감리사, 군수 등의 변방의 지방수령직과 한성부판윤, 외무부 협판, 학무부 협판 등의 관직을 지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1906년에는 대한자강회라는 계몽구국단체의 회장이 되기도 했으나 1910년8월 한일합방이 단행되자 벼슬을 모두 버리고 경기도 안성으로 일단 내려간다.

1911년 105ㄹ인사건의 주모자로 몰려서 서대문 감옥에 갇혔다.

이후 고문과 회유 끝에 3년만에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이후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한사람으로 공동 서명을 부탁하는 민족 대표자 33명의 부탁을 거절해 버린다.

한편으로 독립운동 과정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파와 이승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기호파 간 서로 비난이 끊이지 않자 이런 것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며 일갈했다.

일제하에서 윤치호는 평소와 다름없이 교육,계몽 사업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YMCA의 설립 및 지원이라든지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을 맡는 등의 행동은 꾸준히 전개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참여 요청은 모두 거절한다.


대표적으로 1919년 3월에 3.1 만세운동에 민족대표자로 서명하는 것도 거절했고,송진우 등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인 대표로 가줄 것을 요청하자 헛된 일이라며 거부했다.

신익희와 최남선 등의 거듭된 참여 요구도 거절하였다.


그밖에 미국 군축회의의 한국인 대표로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했고, 이승만등이 주장하는 국제사회의 협조 하에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외교독립론 역시 부질없는 짓으로 치부하고 외면하였다.

한편 3.1 운동 직후 체포당하는 학생들에 대해 민족대표자들이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을 두고 어린 학생들을 제물로 삼았다며 극도로 분개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극심한 조선 내부의 파벌싸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움직이는 한국인의 습성, 유교적 도덕 강박증에 걸린 것을 예로 들며 그는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독립하는건 거의 어려울 것이라 내다봤다.

그 기간 중 그는 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하며, 연희전문학교장, 한영서원 원장, 이화여전의 재단 이사, 배화학당과 적성여전의 교장 등을 지냈다.

 친일협력

1934년 조선총독부가 그에게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한다.

그러나 일제의 회유책이라 생각한 그는 거절한다. 

이후 1938년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안재홍등 국내 독립운동가, 학자들이 줄줄이 구속 수감되거나 취조받자 그는 신원보증을 서주고 이들을 석방시킨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윤치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사고구조 - 내면은 반일이지만 외면은 침묵 내지 소극적 친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 일제가 국내외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적극적 압박을 시작한 것. 윤치호는 결국 이 압력에 굴복해 적극적인 친일행위(학도병 강연, 징병 권유 글 작성 등)을 하게 된다.

이것은 윤치호가 친일파로 나아가는 가장 결정적인 행보였다.

물론 일제 식민체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지만, 그의 현실인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뒤 중추원 참의직을 수락하고 1945년 1월에는 일본제국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8월 일본이 굴복하게 되고 해방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이승만,김구, 존 하지(초대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어쩔수 없이 국내에 남아서 협력해야 했던 사람들의 사연, 독립은 독립운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덕으로 독립된게 아니다 는 이유를 들어 항변했다.

여기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독립운동가들은 한 것도 없으면서 거들먹거리는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물론 택도 없는 헛소리다.

비유하자면 깊은 숲 속을 지나던 A,B 앞에 칼 맞은 사람이 쓰러져 있어 숨 넘어가기 직전인데, A는 손 놓고 방관만 했고 B는 어떻게 구조를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그 사람은 사망한 상황에서, A가 B에게 칼 맞은 사람 생명 살리는데 도움 안 된 것은 너나 나나 마찬가지니까 결국 도덕적 평가도 우리 둘 다 도찐개찐이라고 주장하는 격이다.

그래서 결국 도움 안된 B는 손 놓고 있던 A 자신을 사람 생명을 하찮게 여긴다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식의 궤변론.


병으로 자리에 누운 가운데에도 친일파라는 맹비난을 받자, 친일파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건강은 악화되어 치과 수술을 받고 오던 길에 길가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그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친일파라는 엄청난 비난속에 뇌일혈로 최후를 맞이했다.


유언은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
사후 1960년대에 독립유공자를 포상할때 그역시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나 일제시대 후기에 친일파로 타협한 것으로 모자라 중추원 의원과 귀족원 칙선의원이라는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서훈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윤치호 일기 

윤치호는 처음에는 일기를 한문으로 쓰다가, 영어를 배운 직후에는 영어실력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일기를 영어로 썼다.

워낙에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사람이라 영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창한 영어일기를 썼다고 한다

이후에는 한글로 영어를 번역해 봤자 비슷한 단어가 없다는 이유로 계속 영어로 일기를 썼다.

죽기 직전까지의 그의 일기는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인간 됨됨이가 어찌되었던 간에 윤치호의 일기는 매우 꼼꼼하고 정확하다.

문제는 그의 일기가 죄다 영어 아니면 한자라는 것.

그래서 여전히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그의 일기를 수월하게 읽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만 연세대학교출판부에서는 미국 유학시절(1892년)까지의 일기가 번역 및 출판되어 있다.

여하간 1883년부터 1943년까지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일기를 썼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 시사 이슈, 정치적 사건에 대한 윤치호 본인의 정보수집 및 의견이 담겨 있어 시대사 연구에 유용하게 쓰인다.

또한 미국 유학시에 쓴 일기는 19세기 말 서양에 건너간 한국인을 연구하는 관점에서 읽어도 재미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과 2차 대전을 백인종 대 황인종의 인종전쟁으로 봤고, 황인종의 승리를 위해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화두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보다도 미국이나 유럽 유학을 다녀온 친미파나 친유럽파를 더 혐오스럽게 보았다.

이러한 그의 인종관이 형성된 것은 미국 유학 시절 예나 지금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한 지역인 조지아 주에서 수학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그의 일기를 보면 미국을 인정은 하고 있으나 백인들에게만 좋은 나라라며 미국의 인종차별을 까는 내용이 종종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종론은 윤치호 생애의 최대 병크인 부일 협력을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는 민중이 깨우쳐 일제를 몰아내는 것 자체를 허황된 공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개인주의와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록 개인적 양심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소극적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나 그것 역시 자신에게 해를 부르지 않는 한도였고 적극적인 의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윤치호의 이런 행동은 국제 정세에 대한 예리한 관측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실례로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대해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제일 먼저 예측했던 사람도 윤치호였고 예상이 맞은 것도 윤치호였다.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순진하게도 저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또한 윤치호는 사람들에 대한 탁월한 관찰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윤치호의 이같은 행동은 조선의 장래에 대한 냉소와 체념이 뒤엉켜져 '소극적' 친일행각으로 나타났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윤치호의 합리주의는 녹이 슨 칼과 같았다.

미국에 체류한 기간이 윤치호보다 짧았던 야먀모토 이소로쿠가 미국의 show me the money의 역량을 간파하였던 것에 비하면 그의 현실인식은 빵점이었다.

이를 지나치게 결과론적으로 평가한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 수 있겠지만, 미국에 오래 체제해 있으면서 그들의 국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그가 합리주의를 삶의 기준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더더욱 비판받아야 한다. 

태평양전쟁의 서전(緖戰)에서 일본군이 승승장구를 하였을 때 윤치호는 어느 친일 분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공범이었다.

그는 이완용을 혐오하였는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함께 민간운동을 하던 이완용은 다른 을사오적과 함께 한일합방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그는 이완용을 혐오하다 못해 경멸했다.

윤치호는 그밖에 유길준,서재필,안창호, 이상재, 이승만등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나 유길준과 이상재는 일찍 사망했고, 서재필과 안창호, 이승만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면서 일제시대의 조선에는 그만 혼자 남게 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그는 유길준의 초대를 받아 파티장에 가서 만찬을 했다.

그러나 유길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뒤에 윤치호는 명성왕후 암살의 배후에 조선인 협력자가 있음을 폭로하면서, 명성황후암살의 조선인 협력자 중 거물급 인사로 자신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유길준을 지목했다.

그에 의하면 명성왕후가 암살당하던 날 유길준이 자신을 초대했던건 명성왕후를 암살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움직이지 못하도록 일부러 자신을 만찬에 초대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김구가 죽인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죽인 낭인들중 하나였다라는 것과 다름없는 이다.


고종독살설도 처음에는 불신하였으나 먼 친척이기도 한 윤덕영의 양심없는 행동들을 보면서 고종독살설에 윤덕영의 가담여부를 다소 모호하게 기록, 그러나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실제로 윤덕영의 고종독살설에 대한 증거자료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한편으로 기성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딸과 주변 여성들의 행실을 보고 여자에게 교육이 필요한가 하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이복 동생 윤치창이 미국으로 가는 것도 제수인 손진실이 꼬신 것으로 파악했다.

4대 대통령이자 박정희 정권 때의 야당지도자인 윤보선은 그의 사촌동생 윤치소의 아들이다.

34살이나 나이차이 나는 윤치영은 그의 사촌 동생.


독립운동가 남궁억과도 사돈관계를 맺는데 남궁억의 딸 남궁자경이 그의 둘째 아들 윤광선과 결혼하였다.

다른 독립운동가인 손정도,손원일 부자와도 사돈인데 손정도의 딸이자 손원일의 큰누이 손진실이 윤치호의 이복동생 윤지창과 결혼했던 것.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 이준용과도 인척으로 영선군의 딸이 그의 5촌조카이자 윤보선의 동생인 윤원선과 결혼했다.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 역시 그의 먼 친척으로 윤치호 가문은 윤두수의 넷째 아들 윤흔의 후손이고, 순정효황후는 첫째 아들 윤방의 후손이었다.

해방이후 친일파 내지는 소극적 협력자로 껄끄럽게 취급되다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와 2009년 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에서 그를 '전시체제기(일제강점기 3기)때 적극 협락한 친일파' 분류로 선정했다.

일부(주로 뉴라이트 세력)에서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는 민족문제연구소 뿐만 아닌 대한민국 정부 기관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윤치호는 '''명백한 친일파'''로 규정짓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직을 지냈다는 점과 제국의회 칙선의원'''에 있었다는 것이 있으니깐. 참고로, 대한민국 법원에서도 중추원 참의직에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친일 행위'로 인정하고 있다.

이밖에도 매일신문,경성일보등에 윤치호가 기고한 글들과 담화문 발표한 기사글이 1~2편의 글 정도가 아닌 수백여건이 곳곳에서 흔히 기사에 나와있다.

특히 1943년을 전후로 해서 이러한 기사글들 가운데 윤치호하고 연관된 것이 상당히 많다.

김승학이 펴낸 '친일파 군상'에 따르면, 윤치호는 '친일과 전쟁협력이 옳지 못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임을 알고도 이를 묵인하고 방조한 자'로 분류되어 있다.

2008년 무렵부터 뉴라이트 계열을 중심으로 재평가 분위기가 일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의 시인 임화에서는 등장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해방 후 윤치호의 친일 행위에 격분한 어떤 조직에서 암살했는데 가문에서 그걸 숨기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작품 자체가 임화의 미군정 스파이설을 주장해서 논란이 된 작품이다.

 참고로 이런 이유때문에 이어령은 이 작품을 쓰레기로 몰았는데, 전향자의 논리와 전향의 비극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외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작품이다.


사실상 애국가의 작사가였음이 여러 사료들로 거의 확정되자 애국가를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작사를 한 윤치호 뿐만 아니라 작곡을 한 안익태도 친일파로 분류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씹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60년 넘게 쓴 애국가를 바꾸는 문제는 전혀 간단치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정부가 인정한 친일파인데 윤치호의 작사를 정부가 인정해버리면 필연적으로 애국가 교체 논란이 불거질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는 침묵과 씹어버림으로 일관할수밖에 없을것이다.


재미난 것은 유한양행창업주 유일한 회장은 애국가 공식적 작사가들이 되는 안익태와 알거나 윤치호 아들과 대학 동기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 평전을 쓴 작가도 관련 연구 필요성을 말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 『윤치호서한집(尹致昊書翰集)』
  • 『개화기(開化期)의 윤치호연구(尹致昊硏究)』(유영렬, 한길사, 1985)
  • 『좌옹윤치호전(佐翁尹致昊傳)』(김을한, 을유문화사, 1978)
  • 『좌옹윤치호선생약전(佐翁尹致昊先生略傳)』(김영희, 기독교조선감리회총리원, 1934)
  • 「윤치호(尹致昊)의 근대변혁방법론(近代變革方法論)」(유영렬, 『사학연구(史學硏究)』32, 1981)
  • Yun Chi-ho in America(Kim Hyung-chan, Korea Journal Vo1. 18 No. 6, 1978)
  • 「윤치호(尹致昊)의 전통관(傳統觀)과 국가관(國家觀)」(유영렬, 『사학연구(史學硏究)』29, 1979)
  • 「초기(初期) 윤치호(尹致昊)의 기독교신앙(基督敎信仰)과 개화사상(開化思想)」(민경배, 『국학기요(國學紀要)』1, 1978)
  • 「윤치호연구(尹致昊硏究)」(박정신, 『백산학보(白山學報)』23, 1977)
  • 『독립신문』
  • Hon. Mr. Yun Chi Ho(Kim Kiu Sik, Korea Mission Field Vol. Ⅵ No. 8, 1910)
  • Yun Chi-ho(Donald, N. Clark, Occasional Papers on Korea, University of Washington, 1975)

                                               <3>

 

 

 

“비열한 서북, 신사적 기호” 지역을 선악구도로 본 윤치호

 


 

1929년 3월12일 당대 최고의 거물, 좌옹 윤치호는 셋째 딸의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사위는 ‘대일본제국’ 최고 명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정광현. 어느모로 보나 ‘최고들’ 간의 축복받은 결혼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세인의 눈초리는 따가웠는데, 바로 지역색 때문이었다. 윤치호는 내로라하는 기호집안 해평 윤씨였고 사위는 평양, 즉 서북 출신이었다. 윤치호는 “조롱과 비난, 심지어는 욕을 먹게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윤치호는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안창호는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으며 여운형 등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자신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윤치호는 서북파가 오랜 세월의 억압 속에서 기독교와 근대교육을 받아들여 지도자들로 부상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서북인들은 일본인들보다 기호인들을 더 증오하기에 일본인들에 아첨해 기호파에 대한 비열한 계략을 동원’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기호인들의 결사는 응집력이 없기에 불가능할 것’이니 ‘허심탄회하게 교류하고 신사적으로 대하자’는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비열한’ 서북과 ‘신사적’ 기호라는 구도는 이미 지역을 선악이라는 가치체계로 포획해버리는 은폐된 지역색일 수 있었다. 비열한 서북이라는 타자는 기호파의 신사적 주체성에 영원히 종속될 열등성으로 배치된 것이며 야만 대 문명이라는 식민주의 문법의 레토릭이었다. 자신이 지역감정으로부터 벗어난 신사가 되기 위해 타자를 비열한 지역감정으로 함몰시키는 셈이었다. 게다가 ‘일본인’을 끌어들임으로써 지역대결 구도를 민족적 감정 차원으로 연결시키고자 했다. 실제 그는 2차대전을 황인종 대 백인종의 인종전쟁이라 규정한 일제의 구도를 받아들이고 친일 경쟁에 빠져들었다.

윤치호는 “내 평양사위가 성공을 입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서북파의 거두인 이광수와 허심탄회한 교분을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논쟁은 지역감정의 밖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휘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역감정을 개탄했지만 스스로 그것을 강화하는 자가당착을 실천했는바 그것도 식민주의의 강화를 동반한 것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힘이 곧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제국주의적 인식을 가진 철저한 실력양성론자였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는 좌우명을 충실히 신봉했기에 3·1운동조차 비판의 대상이었고 독립운동은 무용한 수준을 넘어 유해한 것이었다. ‘열등한 민족’의 지역색을 극복할 전망이 부재한 그에게 지역색은 물론이요 민족색마저 사라진 ‘대동아’는 성전을 치르고라도 구현해야 할 유토피아였다. 평양 사위의 성공을 좌절시킨 것은 바로 서울 장인이었고 성공한 것은 식민주의였다.

황병주/한양대 강사, 한국사